[투비스 인물탐험] ‘가출소년’에서 성공한 미용사업가로~. 더 퍼스트헤어 고구원대표가 이 시대에서 살아남기.

2020-11-01 19:13 말하다

▲ 고구원 더 퍼스트헤어 대표는 전국에 6개 직영점을 두고 있는 헤어계의 영파워다. 사진 퍼스트헤어제공


[투비스 황연진 기자] 고려대 부근에 본점을 둔 더 퍼스트헤어는 전국에 6개 직영점을 두고 있다. 더 퍼스트헤어의 수장은 만 39세의 고구원대표다.

제주도에서 부모 몰래 서울로 와서, 서울 청담동을 거쳐 이제는 자신의 헤어숍을 6개나 가지고 있는 그는 주변사람들에게 자기는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꿈을 본다’고 애기한다.

한때 ‘꿈이 없는 세상’. ‘헬조선’을 울부짖던 그가 어떻게 ‘꿈을 꾸게 됐을까?.
지금부터 인간 고구원의 ‘멋진 세상 만들어가기’를 들어본다.[편집자주]

고대표가 읽었던 책중에서 그에게 큰 울림을 준 책은 바로 ‘보고, 깨닫고, 적용’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그 책을 읽고 깜짝 놀랐어요. 복잡하던 내 머리를 한번에 시원하게 뚫어줬어요. 새로운 것, 뭔가 꿈을 만들기위해서는 기준을 넘어야 하는데, 그 책은 저에게 넘어설수 있는 기준을 마련해 준거죠”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이 여기까지 오는데 그를 담금질해준 3명의 멘토를 소개하는데, 인터뷰앞부문을 다 보낸다.

첫 번째 멘토는 바로 고 대표 인생의 고비고비마다 등장하는 3째누나다, 그리고 두 번째가 미용을 시작해 살아가는 동안 정신적으로나, 또 경영자로 커가도록 도와준 김덕기교수, 그리고 허약한 건강, 허약한 마음으로 힘든시기를 보낼 때 등산으로 새로운 삶의 희망을 준 대한미용산악연맹 김재욱대장이다.

“세번째 누나의 이야기는 앞으로 여기저기에 엄청 등장합니다. 그래서 먼저 김재욱 대장님을 소개합니다. 평소 등산이란 것은 ‘올라가면 내려오는 것인데, 왜 올라갈까’라고 생각했던 저의 등산관, 인생관을 완전히 바꿔 버린 분이죠. 힘들고 어려울 때 등산을 하면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쭉 올라가면서 직관력을 갖게되죠. 그래서 저는 등신에 반해 버렸고, 또 김재욱대장님께 매료됐습니다”

이들의 도움을 얻은 고대표는 현재 고대부근에 45평의 더 퍼스트헤어 본점을 비롯, 인천과 서울 미아동등 모두 6개의 헤어숍을 갖고 있다.
그런데 미용실 6개를 갖고있는 헤어디자이너가 어디 한두명인가? 언론에까지 나올정도의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 고대표는 자신의 처지에 한숨짓기보다는 스스로를 째찍질하며 불가능을 가능케 한 사람이다.
빨리 치치고, 순간 포기해버리는 요즘 시대에 고대표는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미용의 바다에 빠져들기까지~].

고대표의 고향은 제주도다. 한림공고 건축과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와 함께 동행한 사람은 바로 친구였다. 친구가 미용을 배우기위해 서울로 간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서울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친구따라 강남간다는 말있잖아요, 그말대로 됐어요. 무조건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그래서 미용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그는 가출이었다, 부모님들은 가난했지만 열심히 살았다. 하지만 10대 후반의 고구원이란 소년을 잡아두기엔 역부족이었다.

미용은 ‘뻔한 그의 인생’에 뭔가 ‘무지개 피는 삶’을 이 찾아올 줄 알았다.
그래서 서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바로 춘천으로 달려갔다. 춘천에는 평소 그를 가장 잘 이해주는 3째 누나가 있었다. 누나 역시 미용쪽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누나는 그를 맞아주었고,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학원비까지 대줬다. 그는 이후 처음으로 뭔가에 열중할 수 있었다. 남들은 6개월 공부해야 합격할 것을 그는 2달반만에 끝내 버렸다.

“진짜 그때만큼 열심히 공부해봤던 때도 없었던 것 같아요. 거의 모든 시간을 학원에서 공부만 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자격증을 땄다.
‘노력은 나를 저버리지 않는구나’라는 것도 이때 배울 수 있었다.

▲ 고구원대표의 미아점. 사진 더 퍼스트헤어제공

이후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자격증을 딴 사람을 바로 정식직원으로 뽑아주는 곳은 한곳도 없었다.
서울하고도 강남, 그중에서도 뷰피 패션사업으로 가장 활발한 곳. 바로 압구정동, 청담동에서 그의 첫 미용생활이 시작됐다.

처음 이곳은 천국같았다!. 가장 화려한 곳에서, 화려한 조명 밑에서 성공한분들을, 연예인들을 지켜보면서 10대 후반의 청년은 ‘화려한 꿈’을 꿀 수 있었다. 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에 반해 어려움도 많았다. 좋지않은 처우와 불평등한 삶의 질이 그것이었다. 그래서 더욱 돈 벌어서 성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절망의 늪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래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 탈출구가 군대였다.

‘그래 어차피 가야할 군대, 이때 갔다오자!. 군에서 제대할 때는 뭔가 달라져 있겠지’

그리고 2002년 군입대했다. 그리고 2004년에 제대했다.
병역의 의무까지 마친 고구원대표에게는 뭔가 많이 바꿨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바뀐게 없었다.
어찌보면 더 안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군대를 갔다오니 여자동기들은 대부분 디자이너가 돼 있었고, 자신의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했다.
다양한 미용대회에도 출연해봤다.

잠을 안자고 노력하고 연습하고 미용대회에 나갔다.
하지만 열심히 하고, 나름 자신도 있었지만, 결과는 별로였다.
왜 그럴까? 연줄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내 노력이 부족해서 일까? 다시 고민에 빠졌다.

▲ 고구원대표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매우 중시여긴다. 사진은 소속 헤어디자이너들이 함께한 여름 수련회. 더 퍼스트헤어제공

이렇게 2년이란 시간을 흘러보냈다.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이었어요. 진짜 뭘해야 할지 몰랐죠. 그때 다시 나의 구세주 3째누나가 날 불렀어요. 당시 누나는 일본에서 헤어디자이너를 하고 있었죠. 두말할 필요도 없었어요. 무조건 일본으로 달려갔어요”.

그리고 많은 대화를 했다. 일단 새로운 세계에 빠져보기로 했다.
그리고 일본말을 배웠다. 어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뭔가 새로운 돌파를 찾기 위해 고민했다. 더듬더듬 배우 일본어로 독서실로 달려가서 공부했다. 닥치는데로 읽고 노력했다.

2급 일본어를 땄다. 그런데 이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2배나 기간을 단축해서 딸수 있었다. 아마 그때도 처음 미용자격증을 딸때만큼 힘들었던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출이 정당화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그때 가출하지 않았다면 이같은 도전을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국으로 왔다.
그리고 고민했다.
헤어만 잘 만진다고, 그러니까 기술만 좋다고, 되는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람들과의 관계. 공감의 능력도 필요했다.

2005년, 그해는 고대표에게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자신만의 공간, 미용실 차릴 것을 결정한 것이다. 내가 남의 집에서 화려해지기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곳에서 스스로 자신을 키워보기로 했다.
당시 선배랑 고대부근에 미용실을 차리려했지만, 조금 방향이 틀어져서 스스로 혼자 하게됐다. 이때 ‘구세주인’ 누나가 다시 그를 도와줬다.


▲ 더 퍼스트헤어 고구원대표는 사회와 국가에 봉사를 할수 있는꺼리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그의 멋진 계획을 많은 사람들은 응원하고 있다. 사진 더 퍼스트헤어 제공


그것이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2009년 13평짜리 미용실을 고려대 부근에 차렸다.
고대표와 그의 누나, 그리고 알바생등 3명이 시작했다.
그래서 어려움도 있었다.
직원들은 키워놓음 도망갔고, 13평짜리 작은 헤어숍이다보니, 더러 억울하고 섭섭한 일도 생겼다.
하지만 이것이 인생이려니 배워갔다.

“그때 많은 것을 배웠어요. 커간거죠. 어려워진 경영현실에서 한 미용컨설턴트를 만낫죠. 무조건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컨설턴트를 그의 요청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보잘것없고, 발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랬겠죠?”

그것이 그의 ‘오기’를 발동시켰다.

다시 생각했다. 그리고 찾아낸 것이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었다.

“고객의 입장에서 와보고 싶은 샬롱을 만들어야 겟다고 생각햇어요. 생각의 전환이었죠”
다른 말로 말하면 미용사업의 본질은 교욱사업이라는 것. 그때부터 후배들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차츰 안정됐다. 좋은 후배들을 많이 확보하니 손님은 덩달아 많이 몰렸고, 이것들은 선순환됐다.

그리고 4년후에 2호점을 냈다. 고려대 부근이었다.
본점도 45평 규모로 옮겼다.

그리고 2014년에는 결혼도 했다.
집사람은 일밖에 모르는 천상 ‘헤어디자이너’였다. 미용모임을 통해서 알게됐다. 구애 끝에 결혼했다. 결혼후 그는 기술, 구대표는 경영으로 분리해서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가기 시작했다.

이후 2016년에만 3개의 헤여솝을 더 오픈했다.

지금까지 그는 고려대 3개, 마아점 1개, 인천에 2개 등 모두 6개를 운영하는 미용사업가가 됐다.

“어느날 퇴근길에 40대 후반의 남성디자이너가 노란색의 긴 머리를 묶어서 늘어뜨린채, 열심히 자신의 고객 머리를 만지는 것을 물끄러미 처다보게 됐습니다. 나도 나이 들어서도 저렇게 멋지게 자신의 일에 열중할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어요. 그래도 더욱 더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의 뇌리를 스치더군요. 그래서 다시 시작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 우리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잘 살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나와 내 가족, 그리고 나의 고객들 뿐만 아니라, 뭔가 사회와 국가에 봉사를 할수 있는꺼리까지 고민하고 있다.
고구원의 끝없는 도전, 그도전의 끝은 어디일까?
우리 모두주시해봐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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